번역생각(반면교사 혹은 타산지석)/(펌/ 편집) 번역일반

[장동석의 부커홀릭] 번역을 위한 별명

잔인한 詩 2010. 8. 25. 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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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좀 팔린다 싶은 책들은 대개 번역서다. 그래서인지 출판사들은 높은 선인세를 마다 않고 각종 번역서 잡기에 혈안이다. 요즘 같은 불황에 국내 저자를 발굴해서 한 권의 책을 내기까지, 그 지난한 작업을 견뎌내기에는 국내 출판사들의 내공이 그리 깊지 못하다. 쓸 만한 번역서 한 권이 ‘대박’, 아니 ‘중박’ 정도로만 이어져도 이보다 좋은 일은 없으니 출판사들의 한탕주의는 점점 깊어만 간다. 

프랑스의 계몽 사상가 볼테르는 “번역으로 인해 작품의 흠은 늘어나고 아름다움은 훼손된다”고 했다. 제아무리 이중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한다 해도, 모국어 이외의 언어가 지닌 사회성, 문화성, 역사성을 완전히 체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번역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포기하자고 말한들 이미 포기할 수도 없다. 

번역이야말로 인류의 아름답고 유용한 텍스트(혹은 추하고 쓸모없는 텍스트)를 자국어를 쓰지 않는 이방인에게 전해주는 사회적 약속이다. ‘바벨탑 사건’ 이후 번역은 문화의 교환과 전파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활동이 됐다. 사회적 약속을 들먹이기 전에 출판계 현실을 보면 번역이 사라질 수 없는 이유도 있다. 

한국에서 출간되는 책의 약 30퍼센트는 번역서이고, 그 중 조금 팔린다 싶은 책의 70퍼센트 이상은 번역서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번역’이 없었다면 한국 출판사 중 상당수는 존재의 근거 자체가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번역의 탄생>을 쓴 번역가 이희재는 “번역은 외국어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한국어를 바로 세우는 작업”이라고 했다. 

수많은 번역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듯, 번역은 외국어 실력이 아닌 우리말 실력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에 주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번역학원 몇 개월 수강하면 번역가 행세를 할 수 있는 상황과, 영일사전을 바탕으로 영한사전을 만드는 현실에서 이는 납득 불가의 문자다. 

번역은 단순히 외국 문자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글쓰기’다.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 기초적인 원칙이지만 두 언어의 문법 구조를 도외시한 기계적인 번역에 그칠 수도 있다. 몇몇 인터넷 포털의 번역 서비스가 조악한 수준인 것처럼, 원문에 충실한 번역도 자칫 그 수준에, 아니 그 이하에 머물 수 있다. 

원서를 읽어야만 한국어 번역서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번역서를 내는 이들에게 <번역은 글쓰기다>의 저자 이종인은 “외국어 실력이 뛰어나도 글쓰기 훈련이 없으면 훌륭한 번역가가 되기 어렵다. 번역가 지망생은 글쓰기에 힘써야 한다”고 일침을 가한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1968년 처음 선보인 고려대 김종건 명예교수는 1988년, 그리고 다시 2007년에 번역 출간했다. 

“<율리시스> 번역을 위해, 마치 마음 밑바닥이 무거운 쇠사슬로 묶인 듯 허우적거리며 살았다”고 고백한 김 교수는 한평생을 <율리시스>에 바치고도 “이 불멸의 고전이 담긴 불탕진(不蕩盡)의 찌꺼기는 영원히 미해결로 남아 있다”고 했다. 번역의 길은 끝없는 자기와의 싸움이다. 번역을 기술로 인식하는 세태에 김종건 교수가 보여준 실로 위대하다. 

유대계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철학을 일러 ‘부신’(符信)이라 했다. 부신은 고대 그리스에서 계약을 맺은 동료를 확인하는 데 사용한 도자기 조각이다. 원작의 의미뿐 아니라 세부적 요소까지 애정을 가지고 모국어의 형태로 만들어낼 때, 두 개의 조각이 한 항아리의 파편, 즉 부신으로 인정받는다. 번역, 그것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출처 : http://www.movieweek.co.kr/article/article.html?aid=23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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