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지켜지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만난 의사’에 소개되는 명사를 선택하는 첫째 기준은 ‘우리 국민 중 500만명 이상이 아는 인물’이다. ‘누구’하면 대부분 사람들이 아, 하는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대상인데, 이번 주인공인 이미도 씨는 의사들에게는 낯선 편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의 작업 결과물에 노출된 적이 있는 사람은 줄잡아도 4천만 명은 되지 않을까. 1993년 유럽 예술 영화의 물꼬를 튼 영화 ‘블루’, ‘레드’, ‘화이트’를 시작으로 반지의 제왕 시리즈, 제리 맥과이어부터 슈렉 시리즈, 쿵푸 팬더, 인어공주, 몬스터 주식회사에 이르는 애니메이션 등 ‘무려’ 460여 편에 달하는 외화의 번역을 도맡아온 외화 번역가이자 작가인 이미도 씨를 만났다.
그를 만난 곳은 서울 목동 ㄱ문고. 이곳에서 그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저자 강연회를 열었다. 얼마 전 첫 권을 내놓은 어린이 학습만화 <이미도의 아이스크림 천재영문법>의 출간을 기념한 자리. 행사 시간보다 조금 더 일찍 모습을 드러낸 그는 오늘 하루만도 인터뷰부터 개인 약속까지 몇 개의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작년부터 울산 부근에 작업실을 얻어서 생활하고 있어요. 서울에는 인터뷰나 강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올라오고 대부분 작업실에 있죠.”
그가 ‘자발적 유배’라고 칭하는 작업실 행은 주로 작업 막바지에 애용하던 방식이었는데, 쉰 살이 가까워오고 일할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아예 작업 막바지 분위기를 유지해 더 효율적으로 일해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다고. 서울에서는 하루 7~8시간 일했다면 작업실을 옮기고 나서는 작업 시간이 두 배로 훌쩍 늘었다고.
“자발적 유배로 두 배 더 오래 일해요”
영화 번역가이자 영어와 관련된 수필 네 권을 내기도 한 작가인 그가 갑자기 어린이 영어 학습만화를 제작하는 것에 대해 의외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그는 세 번째 책인 <나의 영어는 영화관에서 시작됐다>를 출간하면서 ‘다음 책 제목은 <나의 영어는 그림책에서 시작됐다>로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단다.
“잘 알려진 그림형제 동화에 나오는 캐릭터 등을 이용해 영어에 접근하는 책을 내고 싶었거든요. 아이디어를 떠올리던 중에 이런 건 만화로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기획에 대해 주변에 말하고 다녔어요. 그랬더니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더라고요. 만화책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애니메이션, 캐릭터 사업까지 연계해보자는 제의에 시작하게 됐어요.”
그의 설명처럼 <이미도의 아이스크림 천재 영문법>에는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 마녀 등 익숙하지만 낯선 동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가 직접 번역했던 영화의 대사도 곳곳에 나온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중간계, 호비트 등등 스토리의 전반적인 배경을 보여주는 ‘반지의 제왕’처럼 동화에서 나오는 주인공 캐릭터들을 영어 학습 스토리 곳곳에 직조해 넣는 거죠. 슈렉처럼요.”
앞으로 30권에 이르는 시리즈를 통해 문장을 난도질하는 한국식 영문법이 아니라 명사부터 조금씩 영역을 넓혀가는 미국식 통합 영문법으로 아이들이 영어를 재미있게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의 목표다.
“제가 디즈니, 픽사, 드림웍스에서 나오는 애니메이션을 많이 번역하다보니 스토리텔링에는 강점이 있다고 믿어요. 스토리를 통해 배우면 기억도 더 오래 가고 재미있게 배울 수 있거든요.”
매체 기고와 스토리 작가 일도 바쁘지만 그를 지금의 자리에 있게 해준 영화 번역 작업도 꾸준히 하고 있다. 지금은 내년 개봉될 ‘슈렉 4’와 신작 애니메이션인 ‘드래곤 길들이기’를 번역하고 있다.
번역가로 잔뼈가 굵은 그에게도 영어는 외국어일 수밖에 없다. 문화적인 배경 차이로 이해 안 되는 내용이 있으면 언제든 원어민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한다. 이렇게 오랫동안 영어 전문가로 일해 온 그에게 영어를 잘 할 수 있는 비결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의사선생님들은 해외 학회에도 많이 가실 테고, 영어 논문도 많이 보실 테죠. 전문적인 분야에서 쓰이는 영어는 전문용어로 이해할 수 있을 테지만 문제는 학회 밖에서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날 때일 것 같습니다. 사회, 문화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눌 때 쉬운 얘기인데 영어로 만들려고 하면 복잡해지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게 다 영어를 난도질하며 배워서 그렇습니다. 주어, 술어, 목적어, 현재완료 등등 적용해야 할 공식이 너무 많은데 말할 시간은 없고….”
그가 추천하는 공부방법은 쉬운 영어사전을 베껴 쓰는 것이다. 미 초등학생용 영어사전을 보면 idea는 ‘a picture in the mind’고 imagination은 ‘the power to make pictures in the mind’다. 이렇게 단어에 대한 쉬운 설명을 지속적으로 접하고 동화책이든 에세이든 영어 스토리를 베껴 적다보면 1~2년 뒤에는 말하고픈 영어를 쉽게 머릿속으로 떠올릴 수 있을 거라고.
“필사즉통(筆寫卽通, 베껴 쓰면 (영어에) 통달할 수 있다), 적자생존(적으면 영어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입니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누구든 이런 작업을 꾸준히 하면 영어를 능숙하게 할 수 있죠. 정말 영어를 잘하고 싶다면 해보세요, 하루 한 페이지씩만 하면 됩니다.”
“의사는 산에서 만나요”
“영화 번역가로서 직업병이 있다면 길가다가 광고 문안, 간판, 플래카드 등을 보면 머릿속으로 자막 크기에 맞게 글자 수를 조정하는 거죠. ‘섯다’ 좋아하는 분들이 차 번호판을 보고 숫자 맞춘다고 하잖아요. 저도 모르게 그러고 있으니, 직업병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하하.”
서울에 올 때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즐거움으로, 작업실로 내려갈 때는 즐거운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기쁨으로, 오가는 왕복 6시간은 이동 독서실에 있다는 생각으로 매순간을 즐긴단다. 게다가 아침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듬뿍 든 신문’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눈을 번쩍 뜬단다. 그러니 스트레스가 쌓일 일도 없고 저녁 식사 후에는 일하지 않는다니 프리랜서들이 흔히들 그러는 것처럼 ‘몰아서 일하기’ 같은 악습에 빠질 일도 없다. 의사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위장병 등 스트레스성 질병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건강을 해칠만한 일도 거의 없어서 병원하고는 담을 쌓고 산단다. 등산 모임에나 가야 의사들 얼굴을 볼 수 있다고.
한때 즐기던 골프는 세 번 정도 허리 염좌를 앓고 나서는 손을 놨다. 골프를 삼가면서 조신하게 기다리다 보면 상태도 좋아지지 않을까 싶다고.
“나인, 꼭 보세요”
올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의사들이 보면 좋을 만한 영화 한 편을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했더니 “제가 얼마 전에 번역을 마친 나인(9)을 추천합니다!”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영화 시카고, 게이샤의 추억 등을 만든 롭 마셜 감독에 주인공으로 다니엘 데이 루이스, 니콜 키드먼, 페넬로페 크루즈, 소피아 로렌, 케이트 허드슨, 주디 덴치 등이 출연하는데다가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작을 몇 번이나 번역한 경험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이번 아카데미 작품상이 유력해 보이는 수작이란다.
“주인공이 영화감독인데 writer's block(작가가 글을 쓰지 못하고 슬럼프에 빠지는 현상)에 빠져요. director's block라고도 할 수 있겠죠. 의사들은 doctor's block이겠네요. 특히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에 빠질 때가 있잖아요. 주위 여러 사람들을 다시 만나면서 자기 성찰을 하게 되고, 슬럼프도 해결하면서 영화를 다시 찍을 수 있게 된다는 내용이거든요. 펠리니의 '8과 1/2'을 리메이크 한 거예요.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주위 사람을 돌아보는 계기도 되고, 의사에게 더욱 어울릴 영화인 것 같은데요. 12월 31일에 개봉하니까 꼭 보세요, 하하.”
글 김민아 기자 licomina@docdocdoc.co.kr
사진 김형진 기자 kimc@docdocdoc.co.kr
출처 : http://doc3.koreahealthlog.com/35197?category=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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