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효제의 지도 없는 여행 /
독일 대학에 온 지 한 학기가 지났는데 영화관에는 딱 한 번 가볼 기회가 있었다. 이라크전을 다룬 <그린 존>이 개봉되던 날 베를린 시내 포츠담 플라츠의 큰 극장을 찾아가 입장권을 끊었다. 조명이 꺼지고 화면이 뜨면서 독일말 대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주인공의 발성이 워낙 실감나는데다 목소리의 톤과 음색까지 너무 자연스러워 나는 미국 배우 맷 데이먼이 독일어로 연기를 하는 줄 알았다. 그만큼 더빙의 완성도가 높았다. 독일에서 외화를 원어 그대로 보려면 별도의 전문 상영관을 찾아가야 한다. 독일을 비롯해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의 큰 나라들은 외화를 거의 모두 자국어로 녹음하는 ‘더빙파’에 속하고, ‘자막파’는 주로 작은 나라들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박희석 박사의 조사에 따르면 이 나라에서 더빙은 유성영화가 본격적으로 보급된 1932년께 시작되었고 2차대전 이후 1950년대부터 더빙산업이 붐을 이뤘다고 한다. 영화 더빙을 전문으로 하는 스튜디오가 전국에 약 45개가 있는데 그중 25개가 베를린에 소재하고 있다. 전체 더빙산업의 연 매출이 우리 돈으로 1600억원 정도이니 적지 않은 수준이고, 더빙산업의 파생효과도 꽤 큰 편이다. 번역이나 음향, 녹음 쪽 인력을 제외하고 전문 성우만 약 2천여명이 활동중인데 이들은 시간당 평균 10만원 정도의 보수를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영화더빙 산업이 활성화되었을까? 더빙을 하면 자막 처리하는 것보다 비용이 더 발생하는데 왜 굳이 더빙을 고집하는 것일까? 우선 관객의 편의를 위해서다. 더빙영화는 자막영화보다 관객의 몰입도를 훨씬 높인다. 유럽 관객들은 화면과 자막을 번갈아 보느라 영화 감상의 흐름이 분산되는 것을 대단히 싫어한다. 자막을 통하면 영화를 ‘바깥’에서 보게 되지만 더빙을 통하면 영화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거다. 또한 인권을 고려한 측면도 있다. 유엔의 통계에 따르면 유럽 국가들의 문자해독률은 거의 최고 수준이지만 그래도 글을 못 읽는 사람이 1퍼센트는 된다고 한다. 독일만 놓고 봐도 약 80여만명이 문맹자인 셈이다. 이런 사람들의 영화관람 권리를 보호해 줘야 한다는 말이다. |
그런데 영화 더빙을 단순히 영화 제작의 후반작업이 아니라 더 넓은 의미의 산업과 문화의 측면에서 접근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작년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에서 나온 <유럽연합 언어산업의 규모>라는 두툼한 보고서가 바로 이런 관점을 제시한다. 예컨대 자막영화보다 더빙영화에 관객들이 8배나 더 몰린다고 한다. 더빙에 드는 추가 비용을 고려하더라도 충분히 경제성이 있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점을 놓치지 않고 있다. “더빙을 하는 것은 경제적 이유를 넘어 자국의 언어와 문화를 보존하려는 욕구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모국어에 대해 실리적이자 동시에 규범적으로 접근하는 유럽인들의 태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위 보고서는 언어산업이야말로 21세기의 진정한 성장산업이라고 주장한다. 2008년 현재 유럽 내 언어산업의 규모는 총 12조원에 달하고, 최소한으로 잡아도 향후 매년 10퍼센트씩 성장이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통·번역, 소프트웨어와 웹사이트 개발, 언어학습 기술 개발, 언어교육 등이 모두 언어산업에 속한다. 신기하게도 언어산업은 금융위기의 여파를 가장 적게 타는 부문이기도 해서 요즘 주요 투자기관들이 언어산업 관련 주식을 대거 매입하는 추세가 관찰된다고 보고서는 지적한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부분은 언어산업을 단순히 외국어 학습이라는 일방통행 과정으로 보지 않고, 외국어와 모국어가 서로 만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쌍방통행 과정으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유럽의 언어산업을 관찰하노라니 자연히 한국의 젊은 세대들이 떠오른다. 고학력이면서 직장에 대한 기대수준이 높은 우리 청년층의 실업률이 8.3퍼센트라는 우울한 소식을 접한 탓이다.
우리 젊은이들은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밀도 높은 모바일 통신, 인터넷, 전방위 소통의 환경 속에 살고 있다. 그러니 멀티미디어나 영상매체에 열광하는 것이다. 고생이 좀 되더라도 그런 분야에서는 신이 나서 일을 한다. 게다가 외국어 교육열은 세계 최고 수준에 속하지 않은가? 이런 새로운 인간형들을 위해 언어와 미디어를 매개로 한 산업, 그러면서도 문화적 자부심을 심어줄 수 있는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정책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본다. ‘어륀쥐’ 발음을 백번 따라 해도, 포클레인으로 낙동강 천리 길을 아무리 파 뒤집어도 우리 미래를 위한 해답이 될 순 없다. 인적 문화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산업진흥이 결국 정답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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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이지만, 경복궁 전철역에서 자하문 쪽으로 가다 보면 통인동 길가에 세종대왕이 탄생한 곳을 가리키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나는 그 부근에 갈 때마다 일국의 문자체계를 만든 창시자를 기리는 세계 유일의 명소를 우리 후손들이 잘 활용하지 못한다고 느끼곤 했다. 그 주변 일대를 가칭 ‘세종대왕 애비뉴’로 조성해서 언어산업의 메카로 키우자고 하면 황당한 발상이 될까? 한국어와 외국어가 창조적으로 교류하고, 더빙 스튜디오들이 인왕산 자락에 들어서고, 무공해 첨단 교육·문화사업의 일자리가 만들어져 젊은이들이 구름같이 모이는 지역으로 말이다.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말과 글 때문에 답답해하는 것을 이해하고 요즘 식으로 말해 민중의 언어권리를 보장해 주려 노력했던 군주였다. 21세기 젊은이들의 노동권리를 보장해 주기 위해 ‘애비뉴’ 자를 붙여 언어산업 특구를 키우겠다고 말씀드리면 껄껄 웃으면서 찬성해 주실 것이다.
조효제 베를린자유대학 초빙교수
'번역생각(반면교사 혹은 타산지석) > (펌/ 편집) 영화번역'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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