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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와 입맞추는…성우들의 더빙세계"

잔인한 詩 2010. 9. 4.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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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선외화, '슬럼독' 녹음현장…성우가 말하는 더빙의 매력

[스포츠서울닷컴ㅣ김지혜 서보현기자] 소리를 지른다. 침이 튄다. 얼굴이 빨개진다. 땀이 흐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더 많은 침이 튀겨도, 더 많은 땀이 흘러도 괜찮다.

3일 오후 낮 3시. KBS 미디어센터 4층은 성우들의 목소리로 뜨겁다.

"자말, 자말, 자말~"

수은주가 영하로 떨어진 늦겨울이지만 녹음실 안은 달랐다. 십여명의 남녀성우들이 한데 어우러져 웃고, 울고, 지르고, 삼켰다. 그러다 성우의 입모양과 배우의 입모양이 다르게 끝나면 어김없이 NG. 어느 누구의 발음이 살짝만 꼬여도 여지없이 재녹음이다.

분주하기는 바깥도 마찬가지. 연출을 맡은 현혜원 PD는 귀를 쫑긋 세우고 성우들의 발음, 입길이, 톤을 체크했다. 홍유선 녹음 감독은 장비를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소리 담기에 열중했고 송지현 작가는 불가피하게 대본을 수정해야 하는 경우를 대비해 스탠바이 하고 있었다.

그렇게 성우들의 더빙작업은 5시간 넘게 계속됐다. 얼굴 근육을 쓰는 것은 물론이고 손짓과 발짓까지 이용해 캐릭터의 감정을 충실히 전달했다. 그 결정체는 설연휴 마지막 날인 15일 밤 11시, 안방극장을 타고 흘렀다.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더빙현장, 스포츠서울닷컴이 생생한 녹음현장을 찾았다.

◆ "설특선 외화, 우리가 만든다"

한 편의 외화가 안방극장을 통해 전파를 타기까지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 대본과 연출, 더빙, 편집의 4단계다. TV방영용 외화의 경우도 제작 영화와 마찬가지로 연출자의 역량과 대본의 완성도가 중요하다. 여기에 성우들의 더빙이 절묘한 조화를 이뤄야 명품 특선 영화로 거듭날 수 있다.

오는 15일 밤 11시 5분 전파를 탈 '슬럼독' 더빙 작업에는 그야말로 드림팀이 뭉쳤다. 실력파 외화 연출가인 현혜원 PD와 유명 번역 작가 송지현, 그리고 베테랑 녹음 감독인 홍유선 씨가 참여했다. 캐스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주인공 '자말' 역을 위해 성우협회에 소속된 프리랜서 성우들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열었고 그 결과 2년차 프리랜서 남도형 씨가 주인공으로 캐스팅 됐다.

또 다른 주인공인 사회자 '프렘' 역은 28년 경력의 베테랑 성우 신성호 씨가 맡았다. 성우 이 선씨는 '소년 자말'과 여주인공 '레티카' 역을 동시에 수행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다. 이밖에 '조사관' 역에 김준, '스리바니스' 역에 서문석, '마만' 역에 류다무현, '살림' 역에 정훈석 등 총 13명의 성우가 캐스팅됐다.

정각 오후 1시가 되자 온에어(on air) 전광판에 불이 들어왔고 녹음실 안과 밖에 설치된 2대의 브라운관에 '슬럼독'의 영상이 흘러나왔다. 이어 녹음실 내부의 좌우, 중앙 3대의 마이크에 전원이 켜졌고 현 PD의 큐사인과 함께 더빙이 시작됐다.

◆ "더빙, 목소리로 빚는 예술"

녹음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성우들은 시종일관 마이크를 옮겨 다니며 열정적으로 연기했다. 완벽한 시사(성우들이 녹음 전 영상과 대사를 맞춰보는 것)를 통해 이미 브라운관 속 배우들과는 혼연일체 된 모습이었다.

성우들마다 목소리의 색깔이 다른 만큼 녹음 스타일도 각양각색이었다. '레티카' 역의 이 선 씨는 주인공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분위기를 능가하는 긴박한 표정을 지으며 연기에 몰입했다. '프렘' 역의 신성호 씨는 사회자 역할답게 손으로 박자를 끊어가며 발음과 악센트를 정확히 하는 모습이었다.

녹음 할때 모션이나 액션을 자주 쓰는 것은 성우들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선 씨는 "더빙은 목소리만 내는 것이 아니라 정극 연기를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라며 "상황에 집중해서 연기를 하다보면 본인도 모르게 표정과 몸짓을 쓰게 된다"고 말했다.

성우들이 더빙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연기력과 발음이다. 성우 서문석 씨는 "이 두 요소가 갖춰져야 시청자들이 편안하게 작품에 몰입할 수 있다"며 "입길이는 그 다음 문제다. 연기력에 집중 하다보면 발음과 톤, 입길이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돼있다"고 말했다.

반면 제작진은 입길이에 가장 많은 신경을 쓴다. 현 PD는 "HD화면이 보편화 되면서 시청자들의 눈이 보다 정확해졌다"며 "배우와 성우들의 입이 맞지 않으면 완성도가 떨어져 보일 수밖에 없다. 오차를 줄이기 위해 대본을 꼼꼼히 만들고 녹음 할때 여러 번 수정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 "목소리, 자막 이상의 매력이 있다"

약 5시간에 걸친 녹음은 오후 6시경 마무리됐다. 영화 더빙이 끝나고는 예고편 내레이션 녹음이 이어졌다. 예고편은 극중 '마만'으로 분한 류다무현 씨가 맡았다. 이처럼 예고편 녹음은 보통 극중 출연자가 맡는 경우가 많다.

예고편 내레이션까지 끝났다고 해서 모든 작업이 다 마무리된 것은 아니다. 최종 단계인 편집이 남아있다. 더빙 시 성우들은 원어 대사 보다 2~3초 늦게 대사를 녹음한다. 후반 작업에서는 성우들의 목소리를 앞으로 당겨 원작 배우의 입길이와 맞추는 일을 집중적으로 하게 된다.

홍유선 녹음 감독은 "더빙을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최종 편집 작업도 아주 중요하다"며 "정확한 입을 원하는 시청자들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기술적인 부분을 후반 작업을 통해 보완한다"고 전했다.

또 여기에 음향과 잡음을 체크하는 등의 최종 점검까지 마치면 마지막으로 PD가 엔딩 크레디트 등 자막 작업을 하는 것으로 편집은 마무리 된다. 보통 이 과정은 러닝 타임의 2~3배의 시간이 걸리며 편집 감독과 PD의 고도의 집중력을 요한다.

현혜원 PD는 "최근에는 자막을 선호하는 시청자들도 많지만 더빙의 매력은 어린꼬마부터 나이드신 어른들까지 보다 많은 시청자들이 편하게 영화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라며 "우리의 역할은 정확한 발음과 입길이를 통해 영화의 메시지와감동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 부분에 가장 큰 중점을 둔다"고 전했다.

◆ "성우, 그들이 사는 세상"

"9살짜리 꼬마가 될 수도 있고 60살짜리 노인이 될 수도 있죠.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매력적이예요"

대부분의 성우들은 직업적 매력을 '다양한 삶의 체험'이라고 대답했다. 또 목소리를 통해 여러 사람의 삶을 경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배우처럼 연기 스펙트럼도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았다.

하지만 요즘에는 성우들의 활약이 예전못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공중파에서 외화 수입을 대폭 줄였을 뿐만 아니라 더빙보다는 자막을 선호하는 현상도 두드러지고 있다. 또 최근 명절 연휴의 경우 특선 영화보다 예능 프로그램을 선호하면서 성우들에게 '명절 특수'라는 말은 없어진 지 오래다.

공채 출신 성우들이 예능 더빙, 영화 출연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일례로 미국드라마 'X파일'의 스컬리' 목소리로 유명했던 성우 서혜정 씨는 tvN '롤러코스터'를 내레이션을 통해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독특한 목소리로 전문성을 살리면서 대중들의 인지도까지 얻은 경우라 할 수 있다.

TV광고, 기업 홍보영상, 예능 및 다큐 나레이션 등 활동 범위는 폭넓어졌지만 그래도 성우들이 외화 더빙에 갖는 열정과 자부심은 남다르다. 성우 이 선 씨는 "우리말 더빙을 통해 보다 다양한 세대들이 편안하게 안방에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면서 "자막으로 볼 때 놓칠 수 있는 배우들의 연기 디테일이나 감독의 의도를 명확히 전달 받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여가 생활의 발달로 안방극장에 몰리는 시청자들의 수는 현저히 줄었다. 그러나 더빙을 준비하는 성우들과 제작진의 프로 의식은 여전했다. 이들의 뜨거운 열정이 있기에 시청자들의 명절연휴가 한결 풍성하고 편안해지는 것 아닐까. 땀이 흐르고 침이 튀는 녹음실이 그 어느 곳보다 아름다운 이유였다.

<사진 = 송지원기자>

출처 : http://www.sportsseoul.com/news2/entertain/hotentertain/2010/0215/20100215101040100000000_796336842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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