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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화번역가, 무엇으로 사는가? 외화 번역의 세계 (재펌)
외화번역가, 무엇으로 사는가?
외화 번역의 세계
2007.02.13 / 박수진 기자
외화의 짝패는 자막이다. '국민 외화번역가' 이미도는 활동 폭을 줄였다. 조상구는 번역가로서 은퇴를 선언했다. 그로 인해 생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새로운 번역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포스트 이미도, 포스트 조상구 시대의 징후들을 들여다본다.
“셧 업(Shut up)!” <미스터 앤드 미세스 스미스>(2005)에서 안젤리나 졸리가 브래드 피트의 느끼한 눈빛에 대고 이렇게 외친다. 그 순간, “좋~댄다”라는 한글 자막이 뜬다. 객석의 관객들은 폭소했다. 말없이 눈빛만 쏘고 있는 브래드 피트에게 “입 닥쳐”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미스터 앤드 미세스 스미스>를 비롯, 감각적이고 충실한 번역으로 최근 개봉한 외화들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번역가가 있다. 신세대 외화번역가 박지훈이 그 주인공. 얼마 전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2006년 외화 흥행 톱10에 오른 작품 중 <다빈치 코드> <엑스맨: 최후의 전쟁> <수퍼맨 리턴즈> <박물관이 살아있다> <나니아 연대기-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까지 5편이 그의 손을 거쳤다. <007 카지노 로얄> <보랏-카자흐스탄 킹카의 미국 문화 빨아들이기> 등의 화제작들도 그가 번역한 작품이다. 박지훈은 2002년 극장용 외화번역가로 데뷔해 이래 90여 편의 개봉작을 번역했다. 현재 외화번역가로 활동 중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90년대 활동을 시작한 것을 고려하면 신참에 속한다. <스타워즈 에피소드 3:시스의 복수>(2005) 이후 대작 영화들을 많이 해온 그는 차세대 번역가의 선두 주자로 떠올랐다.
의역과 직역, 그 말의 줄타기
2001년 외화 흥행 톱10 중 절반이 이미도에 의해 번역됐다. 지난 10여 년간 대작 번역을 거의 도맡았던 이미도는 ‘외화 번역’의 대명사다. 그는 최근 출판사 물고기도서관을 차려 출판업을 겸하고 있다. 작품 퀄리티나 자기개발 시간을 늘리기 위해 번역 편수를 줄임에 따라, 다른 번역가가 그의 빈자리를 메워야 했다. 그 틈을 메운 게 박지훈이다.
이미도의 번역과 박지훈의 번역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스타워즈 에피소드> 시리즈는 비교의 척도로 삼을 만하다. <스타워즈 에피소드> 1, 2편은 이미도가 번역했고 <스타워즈 에피소드 3>는 박지훈의 손을 거쳤다. 이미도 스타일이 보편적인 대중을 염두에 둔다면, 박지훈은 마니아층을 고려해 전문용어를 즐겨 쓴다. 영화에 나오는 ‘드로이드’라는 단어가 예다. <스타워즈 에피소드> 시리즈에 나오는 로봇들을 지칭하는 ‘드로이드’라는 용어는 하나의 상품과 같은 고유명사다. 단어의 소유권 자체를 제작사인 루카스필름이 갖고 있다. 이미도는 모르는 사람들을 배려해 '드로이드'를 ‘로봇’으로 번역한 반면, 박지훈은 ‘드로이드’라는 말을 그대로 썼다. 박씨는 "일반 대중들이 인터넷 등을 통해 특정 콘텐츠에 대한 전문성, 마니아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점을 반영했다. 이십세기폭스는 "<스타워즈 에피소드 3> 이후 박지훈에게 대작 영화를 많이 맡기게 됐다"고 말한다.
의역보다는 직역을 중시하는 흐름도 있다. 이는 환경변화도 큰 역할을 했다. 세로자막 위주에서 가로자막으로 형태가 바뀜에 따라 세로자막 시절의 ‘8자로 압축’이라는 압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된 것. 쏟아지는 대사를 8자로 압축해야 했던 세로자막 시절에는 의역이 많아지는 게 당연하나, 12자까지 쓸 수 있는 가로자막에서는 ‘직역’의 여지가 늘었다는 얘기다. 직배사 워너브러더스 남윤숙 이사는 “세로자막에서 가로자막으로 변한 것이 직역의 여지를 넓혔다”고 설명한다. 번역투나 점잖은 단어만 사용하는 경향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한 점도 긍정적으로 먹혔다. <미스터 앤드 미세스 스미스>에서 “니 모습 좀 봐”를 “니 꼬라지 좀 봐”라고 번역하는 등 속된 표현을 쓰기도 하고 거침없이 직설적인 대사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 영화는 액션 장면과 티격태격하는 부부 사이의 대화가 중요한데 이때 적절한 의역이 영화를 맛깔나게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지훈은 배급사의 스타일을 많이 반영하는 편이다. 워너브러더스의 경우 가급적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요구한다. 반면, 이십세기폭스는 장르에 따라 탄력적인 번역을 주문할 때가 많다. 코미디나 SF, 액션물은 유행어를 사용해 재미를 추구하는 편이다. 박지훈이 회사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은 종결어미의 사용과 같은 미묘한 부분에서도 드러난다. “물 좀 달라”는 말도 워너 작품이라면 “물 좀 주세요”라고 번역하는 반면, 폭스 작품이라면 “물 좀….”이라고 번역하는 것. 그 이유는 “직배사는 건축주이고 번역가는 설계자”라는 생각에 있다. 건축주가 설계도 시안을 보고 부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 살 사람, 혹은 집주인이 원하는 부엌으로 바꿔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 외화 번역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자막, 그리고 흥행
회사의 스타일을 그대로 반영하는 박지훈의 성향이 빚는 논란도 있다. <박물관이 살아있다>이 유발한 자막 논란이 대표적이다. 400만 명을 훌쩍 넘어선 대박흥행작 <박물관이 살아있다>은 자막에 관한 찬반논란으로도 화제가 됐다. 미국 박물관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국내 개그 프로그램에서 인기상종가를 달리고 있는 ‘마빡이’가 불쑥 튀어나온 데서 논란이 시작됐다. “Weird(이상해)”라는 대사에서 마술사 이은결이 등장하는가 하면 “열라 짬뽕나” “옳지 않아” 같은 저잣거리 유행어들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극의 재미를 위해 유행어들이 한두 마디 삽입된 경우는 흔했지만, <박물관이 살아있다>처럼 집중적인 빈도로 쓰인 경우는 드물다. 정도가 지나쳤다는 평가가 나온 것이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재미를 위해 쓸 수 있는 표현이다'라는 옹호론과 '의역의 도를 넘었다'는 비판론으로 갈렸다. 어린이 관객을 겨냥한 영화가 메인 타깃층의 입맛에 맞아떨어지는 번역을 함으로써 가족 관객을 불러들이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박지훈은 “<박물관이 살아있다> 원래의 대사가 너무 밋밋해 조금 재밌게 대사를 번역했다”라며 “기존 대사들은 어드벤처라는 장르, 어린이들을 주요 관객으로 끌어 모아야 한다는 마케팅적 요소와 배치되는 부분이 있었다”라고 말한다. 유행어 사용에 적극적인 이십세기폭스의 기호도 한몫했고, 번역가가 이를 수용한 측면도 있다.
클라이언트인 수입사의 선호와 번역가의 색깔이 상충되는 경우가 간혹 있다. 대체로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의
역을 바라는 수입사의 마케팅적 고려와 튀는 표현을 자제하고 원문 번역에 충실하고자 하는 번역가의 직업윤리가 부딪히는 경우라 할 수 있다. 마이클 더글라스 주연의 <위험한 사돈>을 번역한 번역가 A씨는 코미디영화라는 점을 의식해 수입사가 과도한 의역을 주문했던 것으로 당시를 회고한다. A씨는 “과도한 유행어와 의역은 영화에 대한 몰입을 방해한다”며 번역자의 의도를 충분히 반영하도록 회사를 설득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상 번역이 책 번역과 같을 수는 없고, 상업 영화로써 목표를 고려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바벨> <파리의 연인들> 등을 번역한 성지원은 “개인적으론 원문에 충실하고, 영화의 전체 분위기에 맞는 번역을 중시하지만, 수입사가 의견 조율 없이 과도하게 표현을 바꾼다 하더라도 일정 부분 그 회사의 방침을 받아들이는 편”이라고 말한다. 번역된 자막이 제대로 입혀졌는지를 확인하는 자막시사가 끝나고 회사가 번역을 고치는 경우가 있기도 한데, 이럴 경우 이미 번역자의 손을 떠났기 때문에 뾰족한 수가 없기도 하다.
구관이 명관
박지훈을 포함해 현재 극장용 외화를 번역하는 외화번역가는 김은주, 성지원, 홍주희, 이진영 등 6명 정도다. 2002년부터 극장 영화 번역을 시작한 박 씨를 제외하면 대체로 빠르면 91년, 늦게는 99년부터 외화번역가로 활동했다. 외화 번역의 쌍두마차로 불리던 이미도가 편수를 줄이고 조상구가 배우로서 연기에 전념키 위해 외화 번역 ‘절필’ 선언을 한 이후지만 외화번역가의 면면이 크게 새로워지지는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영화 번역시장의 특이성과 맞물려 있다. 미국영화만 따져보면, 한 해 수입되는 영화는 대체로 100편에서 150편 사이다. 지난해 수입된 미국영화는 총 125편이었다. 이를 현재 활동하고 있는 6명으로 나누면 외화번역가 1명이 1년에 평균 20편, 1달에 평균 1.6편 정도를 번역한다. 기존 인력만으로도 포화상태라고 할 만큼 외화 번역시장이 작기 때문에 새로운 번역가의 시장 진입은 쉽지 않다. 외화 수입사들은 개봉하는 영화 한 편 한 편에 많은 심혈을 기울이기 때문에 검증되지 않은 번역가들에게 번역을 의뢰하는 데 보수적이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금언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 외화번역판인 것이다.
구관으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번역가는 김은주다. 91년부터 극장 외화 번역을 시작한 그는 직배사 UIP의 영화를 전담하고 있다.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고 퀄리티가 높아 수입사들로부터 많은 신뢰를 받고 있다. <해리 포터> 시리즈를 비롯, <캐리비안의 해적> 2·3편, <로맨틱 홀리데이> <데자뷰> <샬롯의 거미줄> <아포칼립토> <에라곤> 등이 그가 작업한 결과물들이다. 지금까지 작업한 작품을 합하면 300편 이상의 엄청난 물량이다.
1999년 <007 언리미티드>로 극장 번역을 시작한 이진영은 현재 영화 수입사 유레카픽처스와 주로 작업한다. 최근에는 곧 개봉할 <더 퀸>을 마무리했다. 그 외에도 <세렌디피티> <앙코르> <크래쉬> <퍼펙트 웨딩>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등을 번역했다. <판의 미로>를 할 때는 장르가 판타지이므로 동화적 속성을 강조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동화스러움 없이 밋밋하게 흘러가는 원문 대사들은 과감하게 바꿨다. 예컨대, 오필리아가 전생에 공주였던 왕국은 영어대본에서는 ‘슬프고 먼 왕국(in a sad faraway land)’으로 나오지만 이진영 씨는 동화스러움을 부각하기 위해 ‘별나라 눈물왕국’으로 번역했다. '책 속에 세 가지 미션이 있다'는 표현을 '세 가지 열쇠'로 바꿔 신비함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영상 번역물의 저작권을 인정한 판례를 최초로 만들기도 했다. 그가 번역한 <그녀에게>외 3작품의 자막이 케이블 TV에서 간단한 어미만 달라진 채 그대로 방영되는 것을 발견한 이 씨는 저작권분쟁조정위원회에 관련 사실을 제소하고 저작권을 인정받았다. “<그녀에게> 같은 예술영화는 대사들이 똑같이 가기 힘든데 90% 이상 같았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지만 지나치는 경우가 많은데 문제를 제기해 영상 번역물의 저작권에 관한 첫 판례를 남겼다.”
성지원은 꼼꼼하고 섬세한 번역가로 알려져 있다. <비포 선라이즈> <클로저>처럼 대사에서 문학성이 드러나는 작품을 통해 인정받고 있다. 영화 마케팅 일을 하다가 번역으로 전환한 성 씨도 91년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펄프 픽션> <돌로레스 클레이본> <퍼펙트 웨딩> <헐리우드 엔딩>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등을 번역했고 곧 개봉할 브래드 피트 주연의 <바벨>이 그의 손을 거쳤다. 장 뤽 고다르의 <사랑의 찬가>나 <아워 뮤직> 라스 폰 트리에의 <범죄의 요소> 같은 작가주의 감독의 영화들이나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 등 소규모 예술영화들을 많이 번역했다.
그는 “예술영화들을 번역할 때는 고민이 너무 많아진다”고 말한다. 작가주의 감독의 영화는 대사 하나하나에 작품의 성격이 녹아 있어 이를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너무 난해해서 “아무도 안 볼지 모른다”는 생각에 번역자가 작품 이해를 도울 수 있도록 대사에 앞뒤 맥락을 담아내는 각색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 지금도 양자 사이에서 고민 중인 그는 “상업 영화를 좀 더 하고 싶어요, 편하게”라고 토로했다.
번역가의 생존법
외화 번역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전문 극장용 외화 번역가들이 직접 하는 경우다. 그 외 영화제 상영작은 영화제 번역을 수입사가 사기도 한다. 이 중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들의 자막 판매가 가장 활성화돼 있다. 지난해 열린 11회 상영작 중 <사랑해, 파리> <쓰리 타임즈> <숏버스> 등의 자막이 주요 영화사에 팔렸다.
영화제에서는 원어 번역을 원칙으로 한다. 중국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화들은 5~6년간 꾸준히 영화제 때마다 번역작업을 해주는 인적 풀이 있다. 이란 등 국내에 언어 전공자가 드문 나라의 영화는, 미국의 이란 유학생을 미국의 한국 유학생을 통해 연결해 번역하기도 한다. 어쨌든 최대한 원어 번역을 하기 위해 애쓴다. 일반적으로 극장에서 개봉되는 유럽영화나 중국영화 등은 대체로 앞서 언급한 영어 번역가들이 영어대본을 원어대본과 대조해가며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 번역가들이 원어 전공자들의 도움을 받아 최대한 원어의 의미를 이해하려 노력하지만 원어가 가지는 독특한 말맛과 뉘앙스의 미묘한 차이를 담아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
부산영화제에서 자막팀을 이끌고 있는 조소라 자막팀장은 “프랑스영화, 중국영화를 극장에서 봤을 때 번역이 어색하다 느낄 때가 있는데, 나중에 보면 영어 번역가들이 한 경우가 많다”라며 뉘앙스를 풍부하게 살린 원어 번역의 부재를 아쉬워했다. 하지만 정확한 대사 전달 못지않게, 영화사들은 관객을 고려한 흥미로운 번역 또한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극장에서 개봉되는 비영어권 영화에서 원어 번역을 보기가 쉽지 않은 실정이다. 외화 번역가들도 원어대본을 영어대본과 대조하는 걸 넘어 원어의 말맛을 왜곡하지 않는 방안을 더 고민해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이래저래 외화번역가들은 고민이 많다. 영어만능시대 외국어 고수들이 좀 많은가? 요즘 관객들은 그냥 자막만 읽는 게 아니라 듣기까지 한다. 문장 전체는 아니더라도 단어들을 들으며 번역을 평가하기 때문에 제대로 의역을 했더라도 ‘오역이라 생각하지 않을까, 조심하게 된다. 인터넷을 통한 피드백이 활발하고 피드백의 확산속도도 빠르다보니, 한 번 더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허술한 번역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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