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생각(반면교사 혹은 타산지석)/(펌/ 편집) 자막에 대함

그 자막은 누가 만들었을까?

잔인한 詩 2011. 2. 5.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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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상영 전 외화 동영상 파일들을 재빨리 번역해내는 고수들의 세계
불법에다 수고비도 없고 악성 메일에 시달리지만 그저 즐겁고 재밌어서 밤샌다

▣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A씨는 지방에 사는 서러움이 크다. 이른바 ‘예술영화’가 상영되는 일이 거의 없다. 극장들이 멀티플렉스로 바뀐 뒤로는 더 심해졌다. 통상적으로 끼워넣던 한두편의 우디 앨런 영화나 애니메이션도 완전히 종적을 감췄다. 결국 B영화가 서울에서 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나저제나 극장에 걸리기를 기다리던 A씨는 한달이 지나자 포기했다. 여기서부터는… 지하 세계의 이야기다. A씨는 동료에게서 들은 사이트로 들어가 동영상을 구하기로 했다. 받는 방법이 어려워 동료를 괴롭혔다. 결국 동료와 의가 상할 지경에 이르렀다. 어쨌든 그는 우여곡절 끝에 구했다. 그런데 동영상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처했다. 자막 때문이었다.

철저한 분업으로 중복 작업 피해

자막이 말이니, 원래 소란스러운 거겠지만 이 경우는 심했다. 이 자막은 보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먼저 번역한 이의 연락처가 적혀 있고 “잘못된 부분은 연락 달라”고 포문을 열었다. 자막을 읽어가며 번역한 ‘사람’의 형체가 점점 뚜렷해졌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에는 ‘…’를 나열하고 번역 안 한 것이 번역한 것보다 많았다. 참지 못할 정도가 됐을 무렵 “죄송합니다. 말이 너무 빠르네요”라는 애교스러운 말에 웃음이 났다. 어려운 단어에는 친절하게 주를 달아주었다. 그는 영화를 감상했다기보다는 한 사람을 만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첫 경험이 색달랐던 A씨와 달리 최근 동영상의 자막 번역은 자연스럽고 능숙하다. 퀄리티가 높다. 기술적으로도 완벽하다. 싱크도 맞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다. 영화의 경우 개봉관의 것, 드라마의 경우는 공중파의 것에 버금간다. 경제성을 원칙으로 하는 자막보다도 서브텍스트와 이모티콘을 활용하며 더 훌륭한 경우도 있다.


△ 자막 프로그램 CCPM으로 번역과 동시에 자막 작업을 하고 있는 자막 번역가. 밤을 새워서 작업을 하기도 하지만 이는 불법에 속한다. (사진/ 윤운식 기자)

자막 번역은 대부분 동호회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런 동호회들 사이에는 질서가 잡혀 있다. 동호회는 철저하게 분업을 지킨다(표 참조). 약 4년간의 무한경쟁 시대를 접고 양보를 통해 ‘수준 높은 자막’을 만드는 데 경주한 결과다. 동호회마다 번역하는 ‘주종목’을 정하고, 다른 동호회의 ‘주종목’일 경우는 업로드를 금지한다. 번역 중인 리스트를 올리는 식으로 동호회 내에서의 중복도 피한다. 작업 중인 자막은 동호회 내 게시판에 업로드할 수 없다. 많은 저장용량을 제공하기 때문에 네이트에 드라마 자막 동호회가 많다. 드라마24, 자막으로 여는 세상, 드라마 The O.C., NSC, CSI클럽 등이 있다. 그리고 직접 서버를 운영하는 하비 캡션이 있다.

자막 번역자들은 무엇보다 빨라야 한다. 속도로 해결할 수 없을 때는, 시간으로 해결하려고도 한다. 밤을 새서라도 자막을 완성하는 것이다. <위기의 주부들> 시즌 2의 2부는 미국에서 10월2일 방영되었다. 우리나라 시간으로는 3일이다. 7일에는 공유사이트에 자막이 추가된 <위기의 주부들>이 떴다. 자막동호회가 동호회만 공유하는 유예기간 하루를 빼면 적어도 3일 만에 완성되었다는 말이다. 하루 만에 완성되어 올라오는 자막도 있다.

드라마를 번역하는 이들은 번역에서 ‘고수’일 뿐 아니라 프로그램도 잘 다뤄야 한다. CCPM, 한방에, 사시미 등의 자막 프로그램으로 작업을 한다. 초보자는 자막 작업보다 프로그램을 굴리는 데 더 힘이 들기도 한다. 고수가 되어가면서 단축키 등을 익히게 되면 작업은 점점 더 쉬워진다. <케빈은 12살> 에피소드 70~80편을 자막 작업한 안나(하비 자막 동호회 ID·34)는 초보 시절을 떠올리며 “초반 스킵 기능을 몰라서 앞뒤로 움직이는 데 힘들었다”고 한다.

프로그램을 익히고 나면 점점 더 자막 본연의 본질적인 문제에 천착하게 된다. 책이나 영화의 전문 번역자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근본적인 문제와 비슷하다. 표현 하나가 날밤을 새우게 한다. 중국어권 영화의 자막을 번역하는 빨간 눈물(하비 자막 동호회 ID·31)도 그렇다. “40대의 중국어 고수분이 계신데 그분과 밤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러고는 결론이 마침표를 빼자였지요.” 특히 욕설을 옮기는 경우는 고민이 더 커진다. “너 엄마한테 가라, 중국어로는 정말 심한 표현인데 우리 말로 옮기면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이럴 경우 번역자는 두 가지 중 하나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일본 드라마를 번역하다 지금은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 중인 음악맨(하비 자막 동호회 ID·25)은 “직역으로 가는 길과 의역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한다. 음악맨은 직역이 좋다는 쪽이고, 안나는 “상황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능력이 중요”하므로 의역도 중요하다는 쪽이다.

정신은 아마추어, 실력은 프로


△ 미국에서 방영된 직후 자료공유사이트에서 동영상이 발견되고, 자막은 일주일 이내에 뜬다. 하루 만에 자막이 입혀져 나타나기도 한다. 사진은 미국에서 10월2일 방영된 후 7일 공유사이트에 자막이 추가된 <위기의 주부들> 시즌 2, 2부. 

기존 자막에 이름만 자기 이름으로 바꾸어서 올리는 경우도 있다. 번역을 도둑맞은 것이었다. 이에 발끈한 원자막번역자가 억울해하다가 게시판에 호소를 한 적이 있었다. 게시판 공방의 결론은 자막 번역 자체가 불법이므로 그것의 저작권은 왈가왈부할 게 못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자막 번역가들은 말하자면 범법자들이다. 저작권을 가지는 제작사나 방송사는 자막에 대한 권리, 번역권도 가진다. 법무법인 한결의 문건영 변호사는 “범죄 행위를 할 때 전체를 다 알면서 일부 행위를 나눠서 하는 경우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말한다. 원자료가 불법 동영상(자막파일은 원 영상자료의 파일명과 동일하게 작성된다)인 것을 인지한 후 작업한 것이므로 이들이 법망을 벗어나기는 힘들어 보인다. 단, 동영상이라는 첨예한 문제가 걸려 있어 아직 적극적인 단속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창작적 고뇌’에는 동정론이 있을 듯하다.

‘하비 자막 동호회’는 영화제나 영화사에서 번역을 의뢰하거나 번역을 쓰겠다고 할 때도 일체의 수고비를 받지 않는다. 그들이 처음에 새긴 ‘아마추어 정신’ ‘공유 정신’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다른 동호회도 이와 비슷하게 활동하고 있다.

자막에 남긴 이메일로 가끔 연락이 온다. 이메일의 내용은 “하지도 못하면서 왜 하냐. 다음부터는 하지 마라. 발로 썼냐” 등 막말이 많다. 표현 하나를 고민하니 신경도 많이 쓰인다. 빨간 눈물은 하루라도 빨리 영화를 올리기 위해 12시간 내리 일하다 보니 “손발이 오그라들”기도 했다. 거의 모든 이가 직장이 있기 때문에 일과 뒤 시간을 활용한다. 안나는 ‘투잡’ 사이 남는 시간을 활용한다. 다른 별다른 취미도, 애인도 없다. 빨간 눈물은 매번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나” 하는 회의가 들고, 안나는 “자막을 올렸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고, 자신의 자막이 자기 사이트보다 다른 사이트에서 더 인기를 끌 때” 기분이 상한다. 하지만 안나는 “즐겁다”고 말한다. 빨간 눈물은 “언어를 배운다는 게 마약 같다”고 말한다. 음악맨은 그냥 일본드라마가 좋다. 그들에게도 여전히 이 ‘고행’의 수수께끼는 완전히 풀리지는 않는다.


△ [큰 이미지로 보기]


자포자기한 주부들?

저작권자와 자료공유사이트 이용자들의 쫓고 쫓기는 게임

공식적으로 <위기의 주부들>은 자료공유사이트에 없다. ‘위기의 주부들’ ‘미국 드라마’ ‘housewives’ 등 거의 모든 단어가 ‘금지어’다. ‘에바 롱고리아’ 등 출연 배우 이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애타게’(desperate) 찾다 보면 구할 수 있다. 주고받는 사람간에 약속하여 제목을 바꾸어놓을 수도 있다. <위기의 주부들>의 경우 (처음에는 오역으로 시작됐지만) ‘자포자기한 주부들’ ‘desperate house wives’ 등으로 넣어두는 경우도 생긴다. ‘섹스’(sex)라는 단어가 음란어로 금지어이기 때문에 <섹스 앤드 더 시티> 역시 검색이 어렵다. 그래서 ‘섹스’라는 단어를 피해서 올린다. <섹s 앤드 더 시티> 등으로.

자료공유사이트를 통해서 개봉 전 영화들도 유통된다. 청년필름에서는 <분홍신>의 개봉 전에 디빅(Divix)이 나돌아 각 사이트에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영화사 봄에서는 <정사> <반칙왕> <눈물> 등 과거에 제작된 영화와 최근 개봉영화 <너는 내 운명> <달콤한 인생>에 대해서 업로드 금지 요청을 했다. 하지만 자료공유사이트 운영자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검색어 제한과 보관함 삭제, 사후 경고나 강퇴 조치 등이다. 이 프로그램의 업로드 자체를 일일이 제한할 수는 없다. 이용자의 하드를 모두 뒤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동영상 배포가 목적은 아니지만 자막 동호회에서도 업로드 자료가 있다. ‘네이트 드라마24’는 7월5일 <로스트> <24> <앨리어스> 등에 대해 침해 내용을 전달받았다. 자막 동호회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월트디즈니의 대행사인 미국영화협회에서 동호회가 속한 네이트로 저작권 침해 내용을 전달한 것이었다. 9월20일에는 같은 동호회에 에서 상영되는 드라마의 업로드 금지 및 저작권에 대한 경고 조치가 내려졌다. 네이트24는 해당 영화의 업로드를 모두 금지했다. 자막은 계속 제작할 예정이라고 한다.

무차별적인 단속에 대한 불만은 네이트 드라마24의 게시판에서 간혹 보인다. “<로스트>의 김윤진은 인터뷰에서 우리 동호회를 언급하며 고맙다고 했고, 동호회에서의 인기를 <로스트> 광고에도 써먹었다.” <로스트>가 국내 방송까지 이어진 데는 동호회의 ‘재밌고 정확한’ 번역과 이에 따른 인기 상승이 일조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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