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생각(반면교사 혹은 타산지석)/(펌/ 편집) 영화제목짓기

요즘은‘이 정도 영어는 알지?’ 영화 흥행 결정짓는 `‘제목의 전쟁’`이야기

잔인한 詩 2010. 9. 2.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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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개봉했던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라는 영화가 있었다. 기네스 펠트로우가 주연한 이 영화는 “어찌됐든 나와 결혼할 여자는 예뻐야 한다”는 신념이 투철한 주인공이 어느날 타인의 외모 대신 내면의 아름다움만 볼 수 있도록 최면에 걸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외모 지상주의를 꼬집는 이 코미디물의 원제목은 <쉘로우 할>. ‘얕은’ ‘얄팍한’ 할(남주인공 이름)이라는 뜻으로 얼굴만 예쁘면 만사 오케이라는 식의 ‘얍삽한’ 여성관을 비틀어본다는 영화 내용을 제목에 담았다.
영화수입사에서는 이 제목 그대로 한국 영화관에 걸린다면 내용과 제목을 일치시켜 이해할 관객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고 기억하기도 어려운 말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번역 제목을 달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적당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기억하기도 편하면서 내용과도 어울리는 외화 제목이 만들어졌다.
최근에 로맨틱 코미디물로 인기를 모았던 <10일 안에 남자친구에게 차이는 법>도 좋은 외화 제목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원제목인 ‘How To Lose A Guy In 10 Days’를 그대로 번역했을 뿐이지만 따로 광고 카피를 달 필요 없이 영화 내용을 함축해 말해주는 독특하고 기발한 제목이었다.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처럼 익살스러운 한국말 제목을 달아 흥행에도 재미를 보고 사람들 기억에 오래 남았던 명제목으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와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등이 있다. ‘As good as it gets’를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로 대체하고 ‘There’s something about Mary’에서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라는 타이틀을 뽑아낸 감각이 탁월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 제목들은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광고 카피나 신문기사 제목으로 다양한 변용을 거치며 오르내리는 ‘고전적 유행어’의 경지에 올라있다. 
잘 지은 번역 제목 한 편이 영화를 이처럼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공을 세우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영어 제목을 그대로 가져다 붙이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경향이다.
<베터 댄 섹스> <볼링 포 콜롬바인> <어바웃 슈미트> <갱스 오브 뉴욕> <캐치 미 이프 유 캔> <딜리버 어스 프롬 에바> <펀치 드렁크 러브> …. 최근에 개봉되었거나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외화의 제목들이다. “이 정도 영어는 알지? 그럼 됐어.”라는 투의 태도가 느껴지지 않는가. 외화 제목을 붙이는 수입사와 배급사에서도 “요즘 젊은애들은 영어 제목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원제를 그대로 한글로 표기한다고 설명한다.
외화 수입사인 워너브라더스 코리아의 심영신 대리는 “영어 원제를 그대로 쓰는 추세가 대세”라면서 그 이유는 “미국에서 개봉되는 영화 소식이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바로 들어오고 있어 영화의 주 고객층인 20대 중에는 원래 제목과 영화 정보를 잘 알고 있는 관객이 많기 때문에 원어를 쓰는 것이 마케팅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워낙 영어에 친숙한 세대인데다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를 접할 기회가 다양하므로 원어를 그대로 쓰는 것이 오히려 혼란을 방지한다는 이야기다.
<사랑 만들기>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등을 만든 영화감독 이규형은 ‘돈버는 데는 비밀번호가 있다’(형선출판사)에서 “영화 만드는 사람들은 제목이 반이라고 생각하고 엄청나게 신경 써서 ‘제목 만들기’를 한다”면서 상품이나 프로젝트, 사업체에다 좋은 제목을 잘 지어 붙이고 싶다면 제목붙이는 감각을 기르기 위해 “집 앞 단골 비디오 가게에 노트 들고 가서 한나절만 공부하라”고 권한다. 기사 제목 붙이느라 머리 짜내는 편집자들에게도 해당되는 얘기겠다.
오래 기억에 남는 좋은 영화 제목들은 크게 <내일을 향해 쏴라>과(科)와 <보디히트>과로 나눌 수 있다. 원래의 제목을 완전히 무시하고 새로운 한국말 제목을 달거나 아니면 원어를 그대로 살리느냐의 양 갈래길이라는 것이다. 
<내일을 향해 쏴라>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하고 멋진 영화 제목이고 원제가 <버치 캐시디 앤드 선대스 키드>라는 (적어도 한국사람들에게는) 멋대가리 없는 제목이라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보니 앤드 클라이드>가 <우리에겐 내일은 없다>로 바뀌면서 훨씬 감동적이고 인상적인 영화 제목이 된 것과 같은 경우다. 
<내일을 향해 쏴라>과에 속하는 영화제목들로 <무기여 잘 있거라> <지상에서 영원으로> <깊은 밤 깊은 곳에> 등이 있고 ‘Ghost’가 <사랑과 영혼>으로, ‘Home Alone’이 <나홀로 집에>로, ‘Apocalypse Now’가 <지옥의 묵시록>의 번역 제목으로 바뀌면서 훨씬 ‘폼 나진’ 경우들이다.

그런가 하면 <보디 히트>류의 제목을 붙임으로써 사람들에게 더 쉽게 먹혀들 수도 있다. <스피드> <택시 드라이버> <미드나이트 카우보이>처럼 뜻이 분명하고 느낌이 선명한 영어 단어로 이루어진 제목들이 관객들에게 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다.
83년도에 한국에서 흥행에 성공했던 <보디 히트>는 원제를 그대로 쓴 덕분에 영화를 잘 홍보할 수 있었던 경우다. 영화 줄거리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혈 여인이 고도로 지능적인 함정을 만들어 계획적인 완전 범죄를 달성한다는 이야기로 사실 에로틱하거나 섹시한 장면은 별로 없었다. 그렇지만 에로물에 대한 규제가 지금으로써는 상상하기도 힘들만큼 엄격하던 그 시절, <보디 히트>라는 제목이 불러일으키는 끈적하고 관능적인 느낌에 상상력이 촉발된 관객들은 허겁지겁 영화관으로 모여들었다. (이 글을 쓰는 기자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단, 원어 제목을 그대로 붙여서 <보디 히트>과의 제목으로 성공할 수 있을지를 판단하는 일도 근사한 한국말 번역 제목을 생각해내는 일 못지않게 날카로운 언어 감각을 요구한다. 자칫 번역하기 귀찮아서 원제를 그대로 붙였다는 오해를 받기 쉽다. 우디 앨런의 뮤지컬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나 멜 깁슨, 헬렌 헌트 주연의 <왓 위민 원트>처럼 문장을 통째로 제목으로 쓰는 건 아무래도 무성의해 보인다.
제목이 간결하다고 원어를 그냥 써서 다 잘 통하는 건 아니다. 캐빈 스미스 감독의 <체이싱 아미>는 원 제목을 그대로 붙여 아리송하게 만든 대표적인 경우다. 얼핏 들으면 무슨 군대 영화인가 싶은 이 영화는 <에이미를 찾아서>라는 간단한 번역으로 붙였더라면 내용과 연결되어 훨씬 기억하기 쉬운 제목이 되었을 뻔 했다. 한 시간 반 이상의 스토리텔링을 함축적으로 두세 개의 단어에 담으면서도 관객에게는 상상할 여지와 궁금증을 불러일으켜야 되는 영화 제목 만들기. 끊임없이 새로운 영화들이 만들어져 우리에게 소개되면서 제목 만들기와 관련된 화제도 끝없는 이야기 거리를 제공한다.
오진영 기자

출처 : http://www.miznaeil.com/board/CenterNews_view.asp?sub_cate_id=87&uid=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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