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생각(반면교사 혹은 타산지석)/(펌/ 편집) 영화제목짓기

언어가 힘이다 <11> 영화 제목 번역의 묘미

잔인한 詩 2010. 8. 22. 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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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버터 발음으로 영어를 술술 할 수 있을까요? 이왕이면 3개월 속성으로 가능할까요?” 한국에서 나고 자란 소위 ‘토종’으로 영어로 기사를 써오면서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많은 분께 자주 받은 질문입니다. 답은 항상 간단합니다. “(3개월 속성은) 가능하지 않고요, (버터 발음으로 술술 할) 필요가 꼭 있을까요?” 영어를 너무 공부의 개념으로만 강박적으로 접근하면 재미가 사라집니다. ‘100일 만에 단어 3000개 격파하기’ 이런 책을 출근길 지하철에서 공부하는 건 ‘영어공부=고통’이라는 등식을 성립하게 할 뿐입니다. 영화를 좋아하면 영화를 통해, 음악에 흥미가 있다면 팝송으로 영어 공부를 해보세요. 뉴스클립이 도와드립니다. 이번 주제는 ‘영화 제목으로 만나는 영어’입니다. 먼저 문제풀이로 시작합니다. 

전수진 기자



“맛깔나고 기억에 남아야” … 그래서 ‘박쥐’는 Bat 대신 Thirst 택했죠

다음의 영어 문장들을 올바르게 번역한 답을 골라 주세요. 한국 영화를 좋아하는 외국인들끼리 나누는 대화라는 게 힌트입니다.

A: Hey, did you watch ‘Thirst’ yesterday?

B: Of course I did! I loved it.

A: Well, I didn’t quite like it, actually. But there’s no doubt that the Korean director is a power figure.

B: I can’t agree more with you.


㉮ A: 얘, 너 어제 ‘갈증’ 봤니?

B: 물론이지! 아주 좋았어.

A: 글쎄, 난 사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 하지만 그 한국인 감독이 유력한 인물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B: 내 말이 그말이야.


㉯ A: 얘, 너 어제 ‘박쥐’ 봤니?

B: 물론이지! 아주 좋았어.

A: 글쎄, 난 사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 하지만 그 한국인 감독이 유력한 인물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B: 내 말이 그말이야.


정답은 무엇일까요? 4월 30일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박쥐’를 보신 분이라면 어렵지 않게 정답을 고를 수 있을 겁니다. 한글 영화 제목 옆에 영어로 선명하게 ‘Thirst’라고 적혀 있었지요. 따라서 답은 ㉯입니다.

물론 ‘thirst’라는 단어의 뜻은 ‘갈증’이 맞습니다. ‘박쥐’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a bat’이지요. 그러나 박찬욱 감독은 ‘Thirst’를 영어 제목으로 선택했습니다.

여기에 영화 작명의 묘미가 숨어 있습니다. 한국 영화가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과 함께 한국 영화에 걸맞은 영어 제목을 찾는 일도 그만큼 중요해졌지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다른 문화권 사람들의 귀에 착 감기면서 영화의 뜻도 잘 전달하는 제목을 찾는 것이 한국 영화의 해외 판매에서 중요한 요소가 된 지도 오랩니다.




현지인 마음 사로잡으려면 ‘언어 문화’ 잘 알아야 

그럼 다시 영화 제목으로 돌아가 보시지요. 사실 많은 외국인 한국 영화 전문가들은 ‘박쥐’가 ‘Thirst’가 되는 것을 지지했다고 합니다. 박쥐를 뜻하는 ‘Bat’의 경우는 ‘배트맨’이 연상될뿐더러 뭔가 심오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게 이유입니다. 한국 영화 전문가이면서 한국 대중문화산업의 발전사를 다룬 책인 『Pop Goes Korea』를 올해 초 펴낸 캐나다인 마크 러셀의 말을 들어보시지요. “‘Bats’라는 제목을 붙였으면 밋밋하기 그지없었을 거다. 나도 영화를 봤지만 내용에 상당히 잘 어울리는 영어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어 제목을 그대로 번역하는 것보다 새로운 영어 제목을 붙여주는 게 더 맞는 경우가 많다.”

러셀은 2000년대 초 한국 영화가 해외 판매의 날개를 달기 시작했을 무렵 한국 영화의 영어 작명 과정에 실제로 참여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는 제목은 “영어로 말했을 때 쉽고도 기억에 남아야 하며 호기심을 자극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Thirst’는 괜찮은 선택이었다는 얘기지요.

러셀은 또 박찬욱 감독의 전작인 ‘복수는 나의 것’의 제목이 ‘Sympathy for Mr. Vengeance’였던 것도 얘기했습니다. 직역하자면 ‘복수씨에 대한 연민’ 정도가 되겠네요. “한국어 그대로 ‘Vengeance Is Mine’이라고 했다면 영어로는 식상하게 들렸을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박 감독이 그 뒤 이영애를 주연으로 기용해 만든 ‘친절한 금자씨’의 영어 제목도 ‘Sympathy for Lady Vengeance’로 비슷합니다. 줄여서 ‘Lady Vengeance’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도 있지만, 어쨌든 로마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로마식대로 하는 게 순리겠지요. 그런 면에서 홍상수 감독의 영어 제목은 특히나 재미있습니다. 감독의 초기작인 ‘오! 수정’의 영어 제목은 ‘Oh! Su-jeong’일 법하지만, 아닙니다. 좀 긴데요, ‘Virgin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입니다. 굳이 번역하자면 ‘자신의 남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처녀’ 정도가 되겠네요. 낯뜨겁긴 하지만 이는 사실 프랑스 현대미술가인 마르셀 뒤샹의 작품 제목을 그대로 가져온 거랍니다. 홍 감독의 최근작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어떨까요? 여러 영화 전문 사이트를 뒤져보니 ‘Like You Know It All (마치 네가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과 ‘You Don’t Even Know(너는 잘 알지도 못하잖아)’라고 나와 있습니다. ‘오! 수정’과 비교해 볼 때,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영어 제목은 그나마 비슷한 편이긴 합니다.

올해 칸 국제영화제에 진출한 한국 감독의 작품 중에서 영어 작명이 가장 수월했을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마더’였을 겁니다. 한국어 영화 제목 자체가 영어 단어 ‘Mother’이니까요.

일본 영화 ‘보내는 사람’ 한국선 ‘굿바이’ 미국선 ‘출발’

그럼 이제 반대로 외국의 영화에 한국어 제목을 붙이는 경우를 알아볼까요? 외화의 한국어 제목 같은 경우는 원제와 비슷하되 기억하기 더 쉬운 영어로 작명을 하는 것도 흔한 방법이고, 아예 새로운 제목을 만들어 붙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재미있는 예가 ‘박물관은 살아있다’이지요. 영화가 개봉했을 즈음 아는 외국인에게 ‘Museum Is Alive’를 봤냐고 물어봤다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원제는 ‘Night at the Museum (박물관에서의 밤)’이더군요.

비슷하면서도 좀 다른 번역도 있습니다. 일본 영화의 경우를 예로 들어볼까요? ‘혐오스러운 마쓰코의 일생’이란 영화가 있었습니다. 처음 이 제목을 들었을 때 “‘마쓰코’라는 주인공이 얼마나 혐오스럽기에”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원제를 보니 ‘嫌われ松子の一生 (미움받은 마쓰코의 일생)’이더군요. 영어 제목은 ‘Memories of Matsuko (마쓰코의 추억)’이었습니다.

이렇게 영어권 영화나 한국 영화가 아닌 경우엔 한국어·영어·원어의 제목이 모두 다른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올해 초 개봉했던 ‘굿바이’라는 일본 영화도 그렇지요. 이 영화의 일본어 원제는 ‘おくりびと(보내는 사람)’, 영어 제목은 ‘Departure(출발)’입니다. ‘납관사’라는 직업을 가진 전직 첼리스트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올 2월 미국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았습니다.

우디 앨런의 최근 개봉작인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도 재미있습니다. 이 특이한 제목은 원제와는 거리가 한참 멉니다. 원제는 ‘Vicky Cristina Barcelona’입니다. 두 여주인공의 이름과 배경이 된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를 나열한 거지요. 한국어 제목에 대해 영화평론가들 사이에서 말이 많았다고 합니다. 막장 드라마를 연상케 한다는 반응도 있었고, 원제보다 귀에 확 들어온다는 평가도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말의 오묘한 맛을 살려 제목을 번역하는 게 쉽지 않은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고 보니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라는 영화의 원제는 ‘Lost in Translation(번역에서 길을 잃다)’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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