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생각(반면교사 혹은 타산지석)/(펌/ 편집) 영상번역

[외화 번역가] 감동을 입히는 언어의 마술사

잔인한 詩 2010. 8. 29.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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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96-09-24  27면  (생활/여성)  판  기획.연재

◎명작·졸작을 좌우하는 사람들/청산유수 어학·창작정신 요구/학술다큐·수사물 가장 힘들어/1천여명 활동… 70%이상이 여성/방송경우 10분당 7만원선 수입


추석 명절 영화배우 멕 라이언이 우리말로 안방극장을 파고든다. 농담을 섞어가며 여유있게 수다까지 떨고 있다. 유심히 살펴보면 입 모양이 아무래도 어색하다.

외화에 우리말을 입히는 사람들. 외화번역작가들이다. 이 직업은 62년 KBS TV가 처음 외화를 내보내면서 등장했다.


현재 이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은 1,000여명. 70% 이상이 여성이지만 최근 2∼3년 동안 어학실력이 뛰어난 20대 젊은이들이 대거 진출, 새로운 전문 프리랜서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외화 번역작가에게 요구되는 1차적인 요건은 외국어 실력이다. 말하고 쓰는 데 막힘이 없어야 한다. 대본에도 없는 대사를 그대로 옮겨 적을 만한 수준이어야 하는 것. 그러나 외화번역은 직역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똑같은 어휘라도 알아듣기 쉽고 읽기 편하게 바꿔줘야 한다. 문학작품일 경우 가슴 뭉클한 감동을 줄 수 있는 그런 예술적인 감수성도 필요하다. 외화번역 또한 작가정신이 깃든 창작의 세계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화면을 고정해놓고 꼬박 밤을 세운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극적으로 화해하는 하이라이트 장면이었죠. 「I’m sorry」라는 외마디를 천편일률적인 문장으로 써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껏 잘못 살아왔습니다, 아버지」라고 번역했지요』. 10년째 외화를 번역해온 김덕수씨(40)는 명작을 졸작으로 만들고 졸작을 명작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번역작가라고 말한다. 

방송을 위한 더빙번역은 감탄사 「아」 「어」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필름 속 영화배우와 성우들이 호흡을 척척 맞출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 『어떨 때는 잘생긴 브루스 윌리스와 입을 맞추기 위해 하루에 수백번씩 테이프를 거꾸로 돌렸다 다시 틉니다』. KBS TV 시리즈물을 담당하고 있는 박효진씨(28)는 리모컨을 한참 누르다보면 뉴욕의 골목골목은 물론 쓰레기통이 있는 위치까지 알 정도가 된다고 말한다. 그야말로 『끈기가 요구되는 직업』이라고 덧붙인다. 

극장과 케이블TV, 비디오물을 위한 자막번역가는 특히 작문실력이 뛰어나야 한다. 5∼8초 동안 흐르는 장면에 2줄의 대사만이 허용되기 때문. 한 줄에 13자씩 26자 안에서 더빙물의 대사를 절반 이하로 압축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극장용 영화는 이보다 더하다. 장면당 한 줄에 7자씩 14자 이내에서 소화하려니 대화내용을 글로 옮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엄청난 또다른 창작이 있을 수밖에 없다. 유행어를 섞는 것이 의미를 전달하는 데 훨씬 효과가 있다. 그래서 극장용 영화가 순수한 우리말을 오염시키는 「오역의 주범」으로 불린다. 

『어느 영화를 보니 불어에서 「막스」란 「아주 많은」이라는 뜻인데 「막스가 했다」고 오역했더군요』. 16년째 외화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정원씨(48)는 값싼 번역료를 선호하는 영화사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경험과 자질이 부족한 작가에 의해 명화가 난도질당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것. 관객들만 애꿎은 피해를 보는 셈이다. 
이들의 수입은 경력과 분야에 따라 들쭉날쭉하다. 방송의 경우 통상 10분당 7만원선. 주말 시리즈물을 맡으면 월평균 80만원 정도를 벌게 된다. 반면 비디오물이나 케이블TV쪽은 이의 절반수준인 35만원선. 극장용 영화는 필름 수입가격의 손톱 만큼도 안되는 50만원선에서 거래되고 있다. 

이들은 「영어공부를 하면서 외화번역을 한다」는 사람치고 끝까지 버텨낸 작가는 거의 없다고 말한다. 실력으로 승부하는 프리랜서의 세계이고 사명감과 책임감이 수반되는 전문직종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전문성이나 학문적인 깊이를 요구하는 외화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 전화순씨(37)는 얼마전 MBC TV 외화 다큐멘터리에서 UFO, 우주팽창 등 과학이론을 연구하느라 골머리를 앓았다고 말한다. 

『목격담 등 인터뷰 장면이 많았습니다. 대부분 횡설수설하기 마련이죠. 잘 알지도 못하는 전문용어를 번역하느라 고생했습니다』 
자료조사를 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는 수사물도 마찬가지. 범행에 얽힌 용어는 물론 저속한 표현이나 욕설이 많아 순화된 우리말로 바꾸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나마 「빌어먹을」 「망할놈의 세상」이 허가된(?) 욕이다. 고의적으로 오역을 해야 하는 경우다. 

『그만한 외국어 실력이면 다른 곳에서 일하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외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전업 번역작가로 나설 수 없겠죠』. SBS의 최일하씨(36)는 「명화에 색을 덧칠하는」 번역보다 더 재미있는 일을 찾지 못했다고 말한다.<정유미 기자> 

◎중국어 번역 ‘대부’ 이덕옥씨/30년간 ‘무협세계’ 섭렵/‘거친 작품 셀수도 없어요’/포청천·패왕별희 등 명화 대부분 전담 음향효과까지 맡아 

「무협세계」에서 30년 이상 살아온 중국어 외화 번역의 대부 이덕옥씨(48). 「판관 포청천」 「칠협오의」와 같은 방송물은 물론 영화 「홍등」 「패왕별희」 등 명화는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70년대에는 「근검지」 「비도탈명」 같은 무협지 베스트셀러를 1,000권 넘게 번역했고 80년대에는 「의천도룡기」를 비롯한 1,000여편의 비디오물을 출시해 무협시리즈 선풍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그가 만들어 낸 중국어 작품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 

『송나라의 명판관 포청천은 겉으론 차갑지만 속마음은 따뜻합니다. 부정부패에 맞서 준엄한 심판을 내리는 인물이므로 대사를 점잖게 풀었죠』. 그의 특기는 세태를 풍자하는 문장을 시의적절하게 조미료로 넣는 것. 성수대교 붕괴, 삼풍사고가 터졌을 때는 『우째 이런 일이』라는 대사를 만들어 역사 속의 포청천이 부도덕한 사회를 꼬집도록 했다. 

『무협영화에는 고사성어가 많이 나옵니다. 속뜻을 더빙시간이나 자막에 맞춰 우리말로 함축해 전달하는 것이 제일 고달픈 일이지요』 

특히 중국어 외화는 영어와 달리 대본에 지문이 없다. 영상을 일일이 확인하며 「코웃음 친다」 「째려본다」 등을 만들어 넣는다. 무협물은 또 공중을 날아다니는 액션이 많아 「쉭쉭∼」 「호이∼」하는 음향효과까지 짜내야 한다. 번역가가 아니라 드라마를 새로 쓰는 작가인 셈이다. 

『시리즈물은 후속편이 궁금해지기 마련이죠. 결과가 궁금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맨 끝을 먼저 번역합니다. 전편을 속시원히 볼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 될까요』. 무협의 세계에서 살다보니 그 역시 「신의」를 우선하는 사람이 됐다고 말한다. 

◎신세대 번역가 신경주씨/7살때부터 미국생활 선보러왔다 눌러앉아/오역투성이 영화보고 결심/4년간 400여작품 맡아/‘전문회사 하나 차리는게 꿈’ 

세종커뮤니케이션스 신경주 과장(28)은 대본 없이 영어 대사 영화를 번역하는 촉망받는 신세대 번역작가다. 7살 때 미국으로 가 UCLA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재미교포로 92년 선보러 한국에 들렀다가 번역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데 어느 대목에서 나 혼자만 깔깔대는 거예요. 영어자막이 실제 상황과 완전히 틀렸기 때문이죠.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런 일이 수차례 반복되다보니 오역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녀는 답답한 마음에 번역회사를 찾았다. 그녀 앞에 떨어진 과제물은 중국영화를 영어로 더빙한 작품. 그것을 다시 한국말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첫작품치고는 난이도가 꽤 높았다.

『홍콩배우들은 입을 다물었는데 영어 목소리가 흐르고 있는 거예요. 3개 국어가 혼합된 외화를 번역하느라 비지땀을 흘렸습니다』. 다행히 평가가 나쁘지 않았다. 지난 4년 동안 400여편을 번역했는데 그녀가 가장 아끼는 작품은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번역이 좋아 영화가 한국시장에서 성공했다는 칭찬도 받았다. 

그녀의 이름이 알려지자 여기저기서 회사를 차리자는 제의가 들어오고 프리랜서로 뛰면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는 사람들도 생겼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무조건 「No!」. 단순한 외화 번역 이상의 「기획」에 재미를 붙였기 때문이다. 국내 기업의 세계진출이 활발해짐에 따라 거꾸로 한국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것이 요즘 그녀가 하는 일. 한국말로 된 홍보비디오를 영어 자막으로 바꾸는 것이다. 

『더빙보다는 자막이 좋아요. 원음을 살리는 만큼 감동이 2배가 되거든요. 잔잔히 흐르는 강물 같은 그런 작품을 맡고 싶어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번역 전문 회사를 하나 차리고 싶은 게 꿈입니다』<정유미 기자> 

◎번역가가 되려면/문화센터·아카데미 등서 양성/5년은 돼야 한편 번역 가능 
외화는 크게 3단계를 거쳐 우리말로 번역된다. 우선 외국어로 된 영화를 3회 정도 있는 그대로 감상한다. 작품 전체의 흐름과 연출의도를 파악하고 줄거리를 잡는다. 그 다음 주인공이나 각 배우들의 성격을 분석한다. 극중 인물들이 반말을 하는 사이인지 존칭을 쓰는 관계인지 파악해야 번역할 때 쉽다. 마지막으로 외국어 대본을 놓고 말을 끊어가며 우리말로 번역한다. 방송용 더빙번역일 경우 특히 애를 먹는 것이 화면의 주인공과 대사를 맞추는 일. 입모양에 맞게 우리말의 고저를 살리고, 말하는 속도 역시 한 순간도 틀려서는 안된다. 

외화번역가가 되기 위해선 외국어 실력이 수준급이어야 한다. 의사소통에 막힘이 없고 그 나라의 전통문화까지 이해할 정도가 돼야 하는 것. 하지만 외국어만 잘한다고 번역가가 될 수는 없다. 작문실력이 뛰어나야 한다. 창의력과 예술적인 감수성 또한 필요하다. 직역만 하면 영화가 재미없기 때문이다. 각 방송사에서 마련하고 있는 영상사업단이나 문화센터, 아카데미 등을 통해 번역작가 과정을 밟는 것이 유리하다. 6개월 과정이며 1년에 두차례 각 사에서 40여명씩 선발하고 있다. 5년 정도 돼야 영화 한 편을 제대로 번역하는 수준에 이른다. 


출처 : http://www.chonha.com/korean2/news/newsp-3.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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