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생각(반면교사 혹은 타산지석)/(펌/ 편집) 번역일반

번역과 연주의 공통점

잔인한 詩 2010. 8. 25.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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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9.18 15:21:09 | 최종수정 2009.09.19 09:00:20

글이란 그냥 생각나는 대로 써 내려가면 되는 줄 알았다. 글쓰기가 얼마나 지적 소모가 많은 작업인지도 몰랐고 섬세하고 정교한 노력이 필요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딴에는 낱말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공을 들이고 고치고 또 고치고 해보지만 결과는 언제나 불만스럽기 마련이다. 

이달치 숙제는 무엇으로 메워야 하는가? 살을 다치지 않고는 빼낼 수 없는 낚싯바늘 같은 원고 마감시한을 어떻게 넘겨야 하는가? 피아노라면 하루 종일 치래도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지만 글을 쓴다는 작업은 문외한인 나에겐 참으로 어려운 외도다. 

2~3일을 끙끙거리며 서가 앞을 서성거렸다. `생각하는 갈대`라는 그럴듯한 주제가 떠오르면서 파스칼의 팡세(명상록)에 손이 갔다. 누렇게 빛이 바래고 먼지마저 뽀얗게 쌓인 책, 20년도 넘게 책장 구석에서 맑은 공기를 쐬지 못한 채 숨죽이고 있던 책이다. 어린 시절 지적 영웅 심리와 호기심으로 멋모르고 덤벼 보았던 책, 그러나 난삽하고 유치한 번역 때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던 책이다.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고 하듯이 글을 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것이다. 아니,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 사이에서 음운어형 변화관습 차이까지 극복해야 하는 번역 작업은 창작보다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전문 번역가는 원작에 대한 의무독자에 대한 책임을 이중으로 져야 한다. 그것은 번역가의 숙명이다. 요즘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출판물의 홍수 속에 수준 미달인 번역서들이 많다. 

원작의 아름다움이나 심오함을 살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 우리말답지 않은 문장으로 된 치졸한 번역물이 넘친다. 터무니없는 오역을 해놓고도 버젓이 자기 이름을 걸고 책을 내는 사람들을 보면 연민이 간다. 

번역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연주도 마찬가지다. 연주란 작곡자 작품을 청중에게 번역해 주는 행위다. 수백 개 극장에서 해마다 연주회가 수만 건 열리지만 진정으로 청중을 몰입시키고 감동케 하는 연주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다. 

작품은 작곡자의 것이지만 연주하는 순간만은 연주자의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는 좋은 음악을 만들어 내는 데작곡자 몫이 반이고 나머지 반은 연주자 몫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작품도 엉성한 연주자 손에서는 엉성한 음악으로 표현되게 마련이고 좋은 연주자 손끝에서만 훌륭한 작품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뉴욕에서 연주회를 했을 때 내 매니저가 어떤 부인에게 표를 사 달라고 부탁을 했다 한다. 그러자 그 부인은 독주회는 지루해서 가지 않는다고 거절을 하더란다. 그래서 서혜경 연주는 절대 지루하지 않다. 만약 지루했다고 말씀하시면 표값은 물론 교통비까지 환불해드리겠다고 하면서 티켓을 강매(?)했다고 한다. 연주가 끝난 후 그 부인이 드레스룸으로 나를 찾아왔다. 평생 피아노 독주회에서 한 번도 졸지 않고 들어본 것은 처음이라 말하면서 내 손을 한번 잡아보자고 했다. 

음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타자기를 치듯이 건반을 두드리는 피아니스트들을 보면 참 안타깝다. 그런 연주자들 때문에 청중들이 클래식 음악을 멀리하고 등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연주자는 돈과 시간을 투자해서 연주장을 찾은 청중들을 책임져야 한다. 

그리고 작곡자에게도 그 작품을 청중에게 번역하는 번역가로서 의무를 다해야 한다. 청중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주지 못하는 연주자는 비양심적인 사람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청중을 기만하는 행위기 때문이다. 나는 무대에 설 때마다 청중들에게 몰입의 황홀함을 맛보게 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내게 와서 좋은 작품으로 완성시켜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상상을 하면서 피아노 앞에 앉는다. 

 
[서혜경 피아니스트ㆍ경희대 교수]

출처 :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09&no=491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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