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생각(반면교사 혹은 타산지석)/(펌/ 편집) 영화번역

요절복통 외화 번역 뒷얘기

잔인한 詩 2010. 8. 25.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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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5호] 2003년 08월 03일 (일) 00:20:03

   
  ▲ 영화 <스내치>의 브래드 피트.  
 
외화를 볼 때 영상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자막이다. 관객은 영상과 자막을 함께 보면서 때로는 재미를, 때로는 감동을 느끼게 마련이다. 외화 번역은 단순히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는 ‘직역’이라고 봐서는 안된다. 

정서적, 문화적 차이로 인해 이해하기 힘든 대화를 한국적으로 변형시켜야 함은 물론이고 질펀한 성적 농담과 비속어도 능수능란하면서도 재치 있게 재구성해야 한다. 국내 유명 외화 번역 작가들에게 고난도의 번역작업에 대한 ‘그들만의 노하우’와 뒷얘기를 들어봤다. 

많은 외화 번역가들은 “번역은 글자 수와의 싸움”이라며 “실제 원문의 약 30~40%는 번역과정에서 잘릴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긴 문장을 일일이 번역했다가는 관객이 이를 따라잡기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대한 간결하고 압축미 넘치는 문장을 선호한다. 

보통 외화 번역에선 한 대사가 모두 8글자를 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이는 1초 동안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글자가 평균 4글자라는 데서 기인한다.
따라서 띄어쓰기가 무시되는 것은 물론이고 축약어도 많이 사용된다. 특히 코믹영화에서는 번역작가들이 의역을 할 수 있는 여지가 더욱 많다. 웃음이라는 코드 자체가 문화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 

번역작가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은 바로 사투리다. 특히 캐릭터의 성격 자체가 사투리를 최대한 살려야 하는 것이라면 이를 번역 작업에 반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브래드 피트가 집시 출신으로 나오는 영화 <스내치>가 대표적 예. 

당시 번역을 했던 고은영 작가는 ‘촌놈’ 분위기를 내기 위해 ‘캠핑카’를 한국어로 ‘캠핑꽈아’로 표현하고 ‘밥먹었냐’는 말을 ‘밥은 묵었능교’ 등의 사투리 버전으로 바꿨다. 

고씨는 이 일로 괜한 오해를 받기도 했다. 원문의 맛을 살리기 위해 전라도 사투리를 많이 썼는데, 당시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초기였기 때문에 ‘대통령이 전라도 사람이니 외화번역도 이제는 전라도식으로 하느냐’는 질타 아닌 질타를 받았기 때문. 

영어 발음이 같거나 비슷한 단어를 갖고 등장인물들이 ‘말장난’을 할 경우도 번역작가로선 정말 난감하다. <매트릭스> 1편과 2편, <해리포터 시리즈> 등을 번역했던 김은주 작가는 <무서운 영화2>에서 나온 ‘Grab the chest’, 즉 ‘저 통을 집어’라는 대사를 예로 든다. 원래 ‘Chest’에는 ‘상자’라는 뜻과 ‘가슴’이라는 뜻이 동시에 있다. 

여학생이 ‘저 통을 집어’라는 의미로 대사를 했지만 음흉한 남학생은 느닷없이 여학생의 가슴을 움켜쥐었던 것. 이어 여학생이 ‘내 가슴 말고, 저 상자’라는 대사를 했지만 그냥 그대로 옮기기에는 너무 썰렁했던 것. 그래서 대사를 ‘젖통 말고 저 통’으로 바꾸어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냈다고. 

   
  ▲ <무서운 영화2>의 한 장면, <오스틴 파워 제로>의 한 장면.  
 
비슷한 예는 적지 않다. 질펀한 성적 농담으로 유명한 영화 <오스틴 파워 제로>에서 주인공 오스틴의 애인이 하늘의 별을 보며 ‘저 별이 무슨 별이죠?’라고 묻는 대사가 나온다. 이에 오스틴은 ‘Uranus(천왕성)’라고 대답했던 것. 하지만 이 단어를 일부러 천천히 발음하게 되면 ‘Your Anus’로 들린다. 바로 ‘네 똥꼬’ 정도의 의미. 하지만 애인이 ‘저 별이 뭐냐?’라고 묻는데 갑자기 ‘네 똥꼬’하면 너무 ‘생뚱맞다’는 것이 고민. 결국 작가는 천왕성이라는 단어의 ‘성’자에 착안, 이를 ‘처녀성’이라고 바꿨다고. 

극중 대화 중 반말을 쓸 것인가 존댓말을 쓸 것인가도 면밀히 살펴야 하는 부분 중 하나다. 외국어에는 존댓말이 없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반말 일색이면 한국인의 정서와 맞지 않아 관객들은 어색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극중 인물의 나이가 많다고, 또 직위가 높다고 해서 무조건 존댓말을 써줄 수도 없다. 예를 들어 상사에게 대드는 장면이나 부모님과 싸우는 장면 등이 그렇다. 반말을 써야 영화 내용이 더욱 실감나게 관객에게 다가가기 때문이다. 

부부 사이의 대화에서는 번역작가의 개인적 ‘성평등 의식’이 반영되기도 한다. 보수적인 남성이 번역을 하면 남편은 아내에게 반말을, 아내는 남편에게 존댓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비교적 젊고 개방적인 여성 작가가 번역할 때는 서로 반말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비속어나 욕도 번역하기 까다로운 부분의 하나. 흔히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욕 중 하나가 바로 ‘Fuck’, 또는 ‘Son of bitch’ 등이다. ‘Son of bitch’는 창녀의 아들이라는 의미. 또 ‘Fuck’의 원래적인 의미는 성교를 의미하지만 때로는 정액을 의미할 때도 있다. 물론 원문 그대로 번역했다가는 심의를 통과할 수가 없다. 현재 영화 심의상 허용(?)된 ‘욕’은 ‘빌어먹을’, ‘망할’, ‘젠장’, ‘엿 먹어라’ 정도의 수준이다. 따라서 영화 속 주인공들이 아무리 ‘현란한 욕’을 하더라도 이 수준의 단어들로 모두 순화된다. 

번역작가들은 무엇보다도 ‘국어사랑’과 ‘언어적 재미’ 사이에서 갈등하는 경우가 많다. 작가들은 “영화는 영화로서 봐주었으면 좋겠다”는 주문을 한다. 스크린 오른편 공간에서 빛나는 8글자의 재미, 이를 위해서 번역작가들은 오늘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이남훈 프리랜서

출처 : http://www.ilyo.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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